<나의 아름다운 정원>

제재: 가족, 정원, 어린아이

주제: 성장

개요 1. ‘이 없는 세상

2. 난독의 시대, 만남의 시대

3. 각자의 공간을 찾아가는 과정



작년 한 해가 시작된 연초에 문득 소설이 읽고 싶었다. 그것도 한국 소설을 읽고 싶었다. 인터넷의 정보는 너무나 많고, 내가 찾는 책은 과연 무엇일까하는 막연한 고민도 들어서 쉽게 책을 고르지 못했었다. 그 무렵, 친했던 국어선생님이 손수 한국 소설 3권을 골라 빌려주셨다. 그 중 하나가 심윤경 작가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 이었다. 일단은 제목이 주는 따듯한 느낌에 책을 집어 읽기 시작했다. 소설의 배경은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을 그리고 있고 초등학생 동구의 시선으로 동구와 동구의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짧게 말하면 동구가족의 성장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없는 세상

가족소설, 성장소설이 주는 느낌은 어떠한가. 나만의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한 가족이 고난과 역경을 딛고 나아간다거나, 주인공이 가족과의 불화를 극복하고 스스로 성장한다거나 불편한 요소를 극복하는 따듯한 느낌을 어느정도 기대하지 않는가? 그 의미에서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내 기대를 한 순간에 깨버리는 소설이었다.

어린 동구의 시선으로 본 소설에서, 동구의 가족은 동구의 세상 전부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동구의 세상은 이 없다. 그 틈이라하면 가정의 여유의 틈도, 평화의 틈도 쉴 틈도 없다. 늘 긴장감이 흐른다. 동구의 가족이 늘 긴장감에 조여사는 가장 큰 이유는 할머니의 존재다. 동구의 할머니는 늘 신경질적이고 거친 사람이다. 특히나 동구 엄마에게 가하는 폭언이나 행동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동구를 낳은 엄마에게 , 아들 낳았다고 유세할 생각일랑 애저녁에 말어라, 나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 아니다.” 라고 소리를 지르며 경고하던 할머니는, 실제로 그런 사람이었다.

비단 할머니 뿐만은 아니다. 가부장적인 성향의 동구 아빠 역시 동구의 세상에서 평화의 틈을 깨는 사람 중 하나다. 동구는 어린 눈으로 아버지와 다투는 엄마의 모습, 할머니에게 구박받는 엄마의 모습을 담는다. 그런 동구는 열 살이라는 어린나이에 어리광부릴 틈 한번 갖지 못한 채 철이 들어버린다. 늘 집안일을 도맡아하고 동생 영주가 태어난 뒤론 할머니에게 찬밥신세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동생 영주가 태어난 뒤로는 오빠노릇까지 톡톡히 해낸다. 어린 영주를 안고 동네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급기야 아기 업는 법까지 배우며 보재기로 영주를 업고 다니기까지 한다.

동구의 세상을 보면 틈이 없었던 나의 어린시절이 생각나기도 했다. 소설 속 동구는, 자신의 집의 평화가 깨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때가 있었는데 그 모습이 꼭 나를 닮았다. 어릴 적 우리집도 동구의 집처럼 늘 긴장감이 흘렀었다. 여유의 틈보단 가난의 구멍이 더 컸었고 엄마와 아빠의 다툼도 참으로 다양했다. 그래서 나도 꽤 어릴적부터 철이 든 편이라 그런지 엄마 아빠에게 어리광 한 번 부리지 못한게 가끔은 한이 되었다. 물론 지금이야, 다 큰 자식 둘을 키워낸 늙어버린 부모를 연민의 눈으로 보는 힘까지 길러졌으나 그때의 감정이 꽤 오랫동안 나를 힘들게 하는 건 마찬가지다.


난독의 시대, 만남의 시대

소설의 첫 시작은 동구의 동생 영주가 태어나면서 시작한다. 영주는 동구와 6살 차이나는 사랑스러운 여동생이다. 처음,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할머니는 화투짝을 노려보며 사흑싸리 껍데기! 육시럴허게 복도 없는 지잡년이 나왔구나!”라며 화를 내지만 이내 똘똘하고 귀여운 영주 앞에서 사르르 녹게 된다.

영주가 태어난 뒤로 동구는 가족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런 동구는 3학년이 되는데 그때까지 동구는 글을 잘 읽지 못하고, 글씨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 난독증이 있던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아챈 동구의 담임선생님, 박영은 선생님은 그 이후로 수업이 끝난 후 동구와 함께 한글 공부를 하는 등, 동구에게 각별한 관심을 주었다. 이때부터, 동구의 세상은 가족에서 학교로, 선생님에게로 넓어지기 시작했고 글씨를 읽고 쓸 수 있는 시야까지 넓어지게 된다.

박영은 선생님은, 동구를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봐주었다. 공부는 물론 동구의 가정사나 고민을 들어주고 존중해주었다. 글씨를 읽지 못하는 동구에게, 다른 사람은 머리가 나쁘다고 표현할 수 있었지만 박선생님은 동구한테는 다른 아이들과 다른 점이 있어요.” 라고 말했다. 누구보다 동구를 아끼고, 동구의 착한 심성을 알아봐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동구는 박선생님을 참 좋아하고 잘 따랐다. 부모님의 다툼이 있어도, 이겨낼 하나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쑥쑥 늘었다. 동구에게 박선생님의 존재가 중요했듯, 나에게도 선생님의 존재가 너무나 중요했다.

중학생 시절에 나는 말 못할 고민으로 힘들어 했었는데 평소 좋아했던 도덕선생님께 상담을 요청했다. 점심시간 학교 운동장을 걸으며 내 고민을 묵묵히 듣던 선생님은 작은 위로를 건냈고 나는 짧은 위안을 받으며 상담이 끝났다. 으레 상담이 그렇지 않은가. 이야기를 주고 받고 위로를 건네 받는 그런, 하지만 내 고민이 무거웠던 터라 단순한 위로로는 쉽게 풀리지 않았었다. 그래서 여느때처럼 우울해 하고 있었을 때쯤 도덕선생님은 나를 조용히 교무실로 부르셨다. 그러더니 마음 가는 대로라는 책 한권을 선물해 주셨다. 그리고는 늘, 내게 작은 과자나 사탕 또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구절을 건네주시며 우울에 빠져있지 말라고 해주셨다. 그때부터 나도 점점 내가 갖고 있는 고민을 늘 껴안고 살지 않는 법을 배웠고 고민이 있더라도 일상을 살아가는 힘을 배웠다. 이 모습에서 나는 동구와 내가 비슷해보였다. 나 역시, 중학생 시절 그러니까 동구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았을 때에는 우리집이 세상의 전부였다. 그 세상의 전부의 틀을 깨준 건 도덕선생님이 시작이었다. 동구처럼, 집이 불안하고 힘들더라도 학교에 가면 도덕선생님을 만날 수 있고 다른 생활을 시작하는 경험을 얻었으니 조금은, 고민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생긴 것이었다.

동구의 다른점을 알아봐 준 박영은 선생님처럼, 도덕선생님도 나의 다른점을 알아봐주셨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기회 등등 내게 힘이 되는 많은 것들을 도와주셨다. 동구의 삶에서 선생님과의 만남이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해준 문이라면, 나 역시 도덕선생님과의 만남이 새로운 시대의 문이었다.

 

각자의 공간을 찾아가는 과정

<나의 아름다운 정원> 속 동구의 가족의 성장을 촉발하게 되는 계기는 무엇일까 하면, 나는 영주의 죽음을 말하고 싶다. 이 에피소드는 소설을 읽으며 내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장면인데 다시 생각해보니 영주의 죽음은 동구 가족들에게 성장의 지표가 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영주의 희생으로 얻어낸 결과라는 의미는 아니다) 영주의 죽음은 정말 간결하게 묘사된다. 동구는 영주에게 감을 만져볼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영주를 목마에 태운다. 그 순간, 부는 바람에 눈이 따가워진 동구는 영주의 다리를 꼭 잡고있던 손으로 눈을 비빈다. 그렇게 영주는, 뒤로 넘어가 장독계단에 머리를 찧고 죽음을 맞게 된다.

영주의 죽음 이후, 동구네 집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없던 동구의 세상이 더욱 더 긴장감이 흐르고, 불안해졌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전하는 구박의 소리와 욕이 한층 심해졌다. 그렇게 엄마는 자신을 옥죄는 할머니와 집을 떠나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자신의 공간을 정신병원에서 찾게 된 것이다.

동구는, 삼층집의 아름다운 정원을 보며 늘 마음의 위안을 삼았다. 삼층집의 대문이 열리는 날에는 대문이 닫힐 시간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정원에서 한나절을 보내기도 했다. 동구의 마음의 공간은 그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나는 이 소설을 보고 공간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동구의 집은 가족 누구에게도 평안한 장소가 아니었다. 할머니의 존재, 가부장적인 아버지 늘 집에 시달리는 엄마 그리고 불안한 집을 지켜보는 어린 동구. 영주의 등장으로 긴긴장감이 흐르던 집은 차츰 밝은 기운을 얻는 듯 했으나 영주의 죽음은 그들을 다시 긴장의 세계로 만들어버렸다.

영주의 죽음이후 엄마의 성장은 집으로부터 독립이었다. 자신에게 모진 구박을 일삼는 할머니에게 그동안의 설움과 영주의 죽음의 슬픔을 목놓아 소리친 결과였다. 설령 그게 정신병원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할머니의 등쌀에 밀려 들어간 것도, 누군가의 신고로 들어간 것도 아닌 자발적 선택이었다. 엄마는, 자신을 치료할 새로운 공간을 찾은 것이다.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동구 역시 집을 떠난다. 그 집에 있다면 영주의 생각이 끝도 없이 차오를 것 같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떠난 집은 할머니와 아버지의 몫이다. 사실, 누가 뭐라해도 동구네 집의 기둥은 엄마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이 모질고 하찮게 대했던 엄마의 부재와 햇살 같았던 영주의 부재가 두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그 이후가 궁금했다.

동구는 집을 떠나는 날 아름다운 정원에 작별을 고했다. 동구의 마음의 공간에게서 작별을 한 동구는 이제 새로운 성장의 공간을 찾아 떠난다.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지 않은가? 나는 동구는 매일 그 심정이지 않았을까 하고 감히 추측을 해본다. 우리 모두에겐 각자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 공간은 자신을 혼자 두어 보기도 하고, 지칠 때 마음을 위안삼기도 하고 가족이라는 혈연과 거리를 가져볼 수 있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하다.

나는 올해 여름 이사하기 전까지 내 방이 없었다. 정말, 집에 와도 온 것 같지가 않았다. 늘 나 자신히 온전히 펼쳐져 있는 기분이었고 부모님과 싸우거나 고민이 있는 날엔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절대, 혼자 있을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동구가 아름다운 정원에서 하루 종일을 보내고 싶어 하는 이유에 대해 나와 같은 맘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일찍 철이 들어버린 동구에게 그 순간만큼은 열 살 동구로서 살아갈 수 있는 행복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독립을 꿈꾸는데 그 때문에 동구 엄마의 결심이 한 편으로는 속상하면서 어느정도는 공감이 되었다. 그만큼 동구엄마는 자신의 공간을 갈구한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훌쩍 커버린 동구의 모습이 궁금하다. 아름다운 정원이 아닌, 새로운 자신만의 공간은 찾았을까 하고. 한번은 나와 같은 또래시절의 동구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일찍 철이 들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이야기를, 동구가 좋아했던 삼촌처럼 비판적으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보는 것이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단순한 가족 소설, 성장소설이 아니다. 처음 이 소설을 다 읽었을 때 우울함에 빠져서 한 동안은 이 책의 결말을 알아버린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1년이 넘게 지난 지금, 그만큼 내게 큰 감명을 주었던 책을 보고, 동구를 다시 만나면서 또 다시 나도 동구처럼 아름다운 정원을 갈구한다. 그것은 방 한 칸이 될 수도 책이 될 수도 영화도 될 수도 있겠지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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